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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건강의 모든 것

분석심리학 발전과정과 기본가정

by 코코 라이프 2022. 8. 4.

 융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하던 중 Kraft-Ebing의 책 서문의 "정신병이란 인격의 병이다."라는 글을 보고 마치 하나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자신이 택해야 할 전공이 정신의학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융에게 정신의학은 인간의 영적 체험과 생물학적 사실들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공통의 영역이었으며 그때까지 방황했지만 찾지 못했던 분야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러나 융은 환자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지 않고 그들의 증상에만 초점을 맞추는 기존의 정신의학에 불만을 느끼며 나름대로의 이론체계를 구축해갔다.

 융은 1900년에 취리히의 Burkholz 병원에서 정신분열증 연구의 개척자인 Eugen Bleuler의 차석 조수로 일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만난 한 젊은 여자 환자는 정신분열증으로 진단되었으나 융은 우울증이라는 인상을 받고 나름대로 개발한 연상검사를 해보았다. 아울러 그녀에게 꿈을 이야기하게 하면서 융은 그녀의 과거와 비밀을 밝혀낼 수 있었으며 그녀가 심인성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융은 그녀의 내면세계에 대해서 이해하게 된 모든 것을 말해주었으며 그것이 효과를 거두어 그녀는 2주일쯤 후에 퇴원하였다. 그 후 융은 여러 해 동안 단어연상검사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무의식적인 '콤플렉스'의 존재를 발견하였으며 이것이 프로이트와 접촉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 프로이트와의 만남 : 6년간의 공동작업과 결별

 융은 30세가 되던 1905년에 취리히대학 의학부 전임교수가 되었다. 1906년에 융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고 자신이 한 단어연상검사의 연구 결과와 관련성이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논문을 프로이트에게 보내면서 서신을 통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1907년 2월 27일에 32세인 융은 비엔나에서 51세인 프로이트와 감격적인 상봉을 하고 무려 13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했다. 이후 프로이트와 융은 서로의 견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프로이트는 융을 '정신분석 운동의 후계자'로 생각하였다. 융은 1910년에 새로 결성된 의회장을 맡았으며 두 사람의 우정과 협력은 1913년까지 6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인간관에 있어서 좁히기 어려운 간격이 있었다. 융은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성욕설에 대해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성욕설을 정신분석의 요체로 여겼으며 성욕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정신분석을 버리는 것으로 간주했다. 1912년에 융은 '리비도의 변환과 여러 상징'이라는 책을 통해서 자신의 의견을 표면화했다. 무의식에는 억압된 성적인 욕구뿐만 아니라 종교적 심성과 같은 다양한 창조적 가능성이 내재해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모든 인류에게 내재하는 원형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프로이트에게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결국 융은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1913년 의회장직을 사임하였다. 또한 대학과 개업을 병행하던 생활을 청산하고 연구에만 집념하기 위해서 취리히 대학의 강사직도 사임하였다.



(2) 무의식과의 대결

 1913년에 38세였던 융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결별하고 자신의 심리학을 '분석심리학'이라 명명했으며 1919년까지 자신의 내면세계에 대한 분석작업에만 몰두하는 내향기로 접어들었다. 프로이트와의 결별은 융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이후 6년간 정신적인 위기의 기간을 겪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세상으로부터 철수하고 고독 속에서 자신의 무의식을 깊이 탐구하였다.

 융은 의식으로 밀려드는 무의식적 환상과 충동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그것이 이끄는 방향을 관찰하고 표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융은 아동기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를 느꼈고 돌로 집과 마을을 지으면서 어린애 같은 놀이를 시작했다. 그는 돌과 접촉하는 것이 그의 환상과 창조성을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밀려드는 환상을 그림으로 그리며 따라가거나 환상을 적극적으로 실체화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 대화의 내용을 글로 적어 나갔다.



(3) 분석심리학의 체계화

 1920년의 영국 방문을 시작으로 융은 여행과 학술 활동을 활발히 재개하는 한편 분석심리학의 이론을 정교하게 발전시켜나갔다. 융은 아프리카, 미국, 인도 등을 여행하며 집단 무의식을 지지하는 증거자료들을 수집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인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진지한 연구를 했다. 그들도 무의식이라는 근원적 세계를 다루고 있었으며 그 내용이나 심상을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8년에는 '황금의 꽃'이라는 책을 읽고 연금술의 속성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분석심리학이 원시적 심상과 심리적 원형을 다루는 연금술과 상통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1936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그의 추종자들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했으며 예일 대학에서 '심리학과 종교'에 대한 강연을 하기도 했다.

 분석심리학은 융 자신의 개인적 체험과 환자의 치료 경험뿐만 아니라 서양철학, 동양 종교, 신비주의, 영지주의, 심령술, 연금술, 신화학, 문학과 예술 등 다양하고 방대한 자료에 근거하고 있다. 프로이트와 결별한 이후 융은 원형, 집단적 무의식, 아니마와 아니무스, 그림자와 같은 독창적인 개념을 발달시키며 분석심리학을 체계화해 나갔다. 그는 '심리학 유형',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 '심리학과 연금술', '아이온: 자기의 현상학에 대한 연구'를 비롯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심리학뿐만 아니라 종교, 예술, 문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의 주제들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제시했다.

 융을 중심으로 한 는 1914년부터 와 분리되어 독자적인 길을 걸으며 발전해왔다. 1916년에는 이 창립되어 전문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사교활동의 무대가 되었다. 1918년에 와 이 합병되면서 정규강좌가 생겼으며 제1세대 융 학파 분석가의 수련 토대가 되었다. 1930년에는 가 설립되었다. 는 융의 치료이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련과 자격심사를 담당하면서 분석심리학을 국제적으로 파급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융은 많은 저술과 논문을 남겼으며 사회적 인정과 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1944년에는 심장마비와 임사체험을 하기도 했으며 나치 정권을 옹호한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과 더불어 여러 여성과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의혹을 받기도 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활발한 저술 활동과 더불어 심리치료와 강연 활동을 열정적으로 계속해 나갔다. 이러한 그의 삶은 창조성과 인격적 통합이 최고조에 이르는 시기는 바로 중년기 이후라는 자신의 믿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융은 말년에 색전증을 앓았으며 그로 인한 뇌졸중으로 언어기능이 떨어지기도 했다. 1961년 6월 6일 길고 느린 석양빛이 희미해질 무렵에 융은 86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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